설양성진 / 我的星 (1)
가난한 문학인의 말로란 비참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나의 별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내 하늘을 빛내고 있다.
효성진은 검소한 인생을 살아왔다. 작은 문예지 하나에만 비정기적으로 글을 싣는 이가 받는 인세는 보잘것없었지만, 설령 많은 돈을 벌었다고 하여도 그는 그때와 다른 삶을 살진 않았을 것이다. 효성진의 유품을 정리하는 일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몇 년 동안 미뤄왔던 일이라고 하기엔 무척이나 간단했다. 평생 지녀본 것이라고는 만년필과 원고지가 전부인 사람 같았다. 즐겨 읽던 소설과 시집들은 전부 죽기 전 설양에게 선물로 주었으니 사실상 그의 물건이라고는 펜 한 자루와 종이 몇 장이 전부인 게 맞았다. 글자 하나라도 잘못 쓰면 곧장 새것으로 바꾸는 습관 때문인지 원고지는 산처럼 쌓여 있었다. 이 때문에 설양은 그 종이들을 몇 묶음으로 나누어 거실로 옮기는 걸 여러 번 반복해야 했다. 이 집엔 더는 글을 쓰는 이가 남아 있지 않은데, 전부 어찌하면 좋을까. 효성진의 것이니 버릴 수는 없었다. 집안에 굴러다니는 아무 끈으로나 대충 묶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설양은 다시 안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장롱을 열어 혼자 쓰기엔 너무 많은 이불도 정리를 시작했다. 꼭 모든 것을 끝내버리고 싶은 사람처럼 그는 하나둘씩, 이 집에 남은 모든 것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함께 시장에 나가 사 왔던 요를 바라보던 설양은 문득 시야 끝에 걸리는 어떠한 물건을 발견했다. 저게 뭐지? 요를 내려놓고 허리를 숙여 장롱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손을 뻗었다. 잡힌 것은 종이 더미였다. 오래되었는지 누렇게 변해선 습기 탓에 맨 윗장부터 아랫장까지 물을 먹지 않은 게 없었다. 어느새 정리도 잊은 설양은 제자리에 앉아 흩어지지 않게 종이들을 묶어둔 하얀 끈을 풀어버렸다. 그러고는 위에서부터 한 장씩 검은색으로 새겨진 글자들을 훑어 내려갔다.
- 목이 타들어 갈 듯하여 말이 쉽게 나오지 않는다. 그만큼 다시 주워 담고 싶어지는 말들을 내뱉지 않을 수 있게 되었지만, 꼭 전해주고 싶은 말도 쉽사리 할 수 없다. 한동안 나가지 못했던 새벽 산책길을 오랜만에 걷다가 이전에도 자주 만났던 고양이를 보았는데, 그 아이에게 인사 한마디 건넬 수 없었다. 살살 손을 흔들어 보았는데 알아주었으려나.
그 문장을 읽으며 설양은 조금 웃었다. 한낱 짐승이 무엇을 알아먹겠는가, 다른 이가 그리 했다면 그는 망설일 것 없이 소리 내어 비웃고 조롱했을 것이다. 효성진이 한 행동이어서, 설양의 입가에는 금세 미소가 사라졌다. 그는 그런 방식으로 세상을 사랑하며 살았다. 뒤돌면 효성진이 누구이고 어떻게 생겼는지 까먹을 게 분명한 짐승들에게 말을 걸며 간단한 요깃거리를 챙겨주고, 의사소통조차 할 수 없는 식물도 함부로 밟지 않기 위해 늘 발밑을 살피며 걸었다.
- 잠에 빠져 있는 시간이 늘어간다. 사람은 이렇게 현실과 멀어지는 연습을 하며 기어이 죽음에 도달하는구나. 자연의 섭리란 거스를 수 없으니 초연하게 받아들이려 해도 자꾸만 아쉬운 마음이 들곤 한다. 넓은 세상 속에서 자그마한 둥지를 틀고 사는 내가 어찌 약간의 흐름이라도 바꿀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내 곁에 아이를 볼 때면 종종 죽음이란 것이 유달리 내게는 너무나도 빨리 다가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 오늘도 아이에겐 말하지 못한 채 피 묻은 휴지를 숨겼다. 소매 안쪽에 넣어두었다가 산책을 나갈 때면 꺼내 들어 쓰레기더미 위에 살포시 올려두고 얼른 자리를 벗어난다. 걱정하는 것만큼 심각하지 않으니 괜찮다고 말한 것이 어제의 일이었기에 나는 또 아이에게 비밀을 만들었다. 늘 진실한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던 과거의 내가 우습게 느껴진다.
한참을 넘기며 그간 효성진이 말하지 않던 진심을 설양은 쉴 틈 없이 읽어갔다. 설양에겐 드러내지 않던 고통, 좌절과 절망, 외로움, 걱정 등이 40여 장가량 되는 이 종이 속에 담겨 있었다. 중간쯤 다다랐을까, 다른 것들에 비해 짧은 분량의 글이 나왔다. 마찬가지로 단어 하나하나를 눈동자 위에 새겨 나가던 그는 마지막 문장을 읽더니 다음 장으로 넘기지도 않고, 그저 입술만 살짝 벌린 채 사이로 떨리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 그 아이에겐 언제나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그 말 외엔 해줄 수 있는 말이 내겐 없어서, 그래서 더욱 미안했다.
효성진이 쓴 수많은 글 속에서 이 문장 만큼 설양의 가슴을 찌르는 건 없을 것이다. 그 어떠한 문장보다도 설양을 향한 효성진의 진심이 확연하게 드러나서, 그는 오랜만에 울고 싶어졌다.
부모에 대한 기억은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제 막 걸음마를 뗀 두 다리로 번잡한 시장 바닥을 돌아다니고 있었고, 몇 번 뺨을 얻어맞으니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감이 잡혀서 그대로 살았다. 지나가는 어른의 주머니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돈을 훔치기도 했고, 가판대 위에 꽂아진 탕후루를 주인 몰래 들고 달아나기도 했다. 도둑질로는 성장기의 주린 배를 채울 수 없다는 걸 알고 나서는 나름대로 성실하게 일을 해서 돈을 벌었다. 부잣집 일꾼으로 살다가 그 집 따님과 정사를 일으켜 훔씬 두들겨 맞고 쫓겨났을 땐 세상이 온통 자기만 미워하는 것 같다는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설양은 기억하지 못했지만, 갓난아기 시절의 설양을 주워다가 모유를 먹이고 걸음마를 뗄 수 있도록 도와줬다는 여관 주인에게 붙잡혀 반쯤 강제적으로 여관 청소를 한 적도 있었다. 그럼 끝까지 키우지, 걷자마자 버리는 건 무슨 심보야? 그래놓고 다 크니까 잡아 와서 일을 시켜? 그러나 당장 눈앞의 돈이 중요했기에 설양은 주어진 일을 해냈다.
그러던 와중에 한 기자를 만났다. 지루해 죽겠다는 얼굴로 걸레질을 하는 설양에게 조금의 돈을 쥐여주며 그는 몇 마디 말을 건넸었다. 자신을 금광요, 라고 소개한 남자는 생각보다 설양과 이야기가 잘 통했다. 누군가를 싫어하게 되는 부분이 같다는 점에서 둘은 서로에게 가장 좋은 험담 동료가 될 수 있었다. 덕분에 설양은 얼굴도 모르는 광요의 상사가 엄청난 호색한에 일 처리는 단 한 번도 말끔히 해낸 적 없는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걸 30분 동안 줄줄이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조금 시간이 지나고 나서 광요는 설양에게 글을 가르쳐 주었다. 한참 전에 방문한 손님의 요구사항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기억해 주인에게 전달해주는 걸 보며 설양의 머리가 필시 비상할 것임을 느꼈던 그는 누구보다도 인재를 썩히는 걸 안타까워하는 사람이었다. 혹시 모르지, 미리 키워두면 나중에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될 수 있을지. 여관의 1층에 위치한 찻집 카운터에 앉아 광요가 내준 받아쓰기 숙제를 하던 설양은 꽤 오랜만에 방문한 광요에게 솔깃한 제안을 받았다.
“신문 배달부?”
“맞아. 너도 알겠지만, 요즘 전쟁이니 뭐니 하면서 온 나라가 시끄럽잖아. 세상사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도 늘어나니까 인쇄하는 신문의 개수는 늘어나는데, 우리 신문사가 요즘 배달부 인력이 부족하거든.”
“돈은?”
“적어도 너 여기서 청소 일하는 것보단 많이 벌지.”
그러고 보니 요즘엔 일자리 구하는 게 쉬워서 배달과 같은 고된 일에는 사람이 잘 몰리지 않게 되었다는 손님들의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광요는 정부의 말도 안 되는 부동산 정책 탓에 잠깐 거품이 끼었을 뿐이라고 했지만, 설양은 그런 일에 대해서는 잘 몰랐기에 아무 생각도 없었다. 그냥 땅이 인간 몸값보다 비싸고, 다들 일은 쉽게 구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지만 나는 그러지 못하는 세상이구나, 라고 이해하는 게 다였다. 키워준 정이니 뭐니 하면서 쥐꼬리만 한 봉급을 받는 것보단 광요의 신문사에서 일하는 것이 나을 듯했다. 그렇게 미련 한 톨 없이 여관을 박차고 나온 설양은 새벽같이 일어나 신문 한 무더기를 집어 들어 가방에 쑤셔 넣고 온 동네를 쏘다니며 신문을 전달했다. 툭하면 선전포고에 싸움질이나 해대는 다른 나라 높은 분들 탓에 새벽 배달을 마치고 돌아오면 호외가 잔뜩 쌓이는 일도 다반사였다. 동전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가방 깊숙한 곳에 보관하며 호외를 팔던 그는 저려오는 다리 탓에 잠시 골목길에 주저앉았다.
그 순간을 설양은 여전히 잊지 못한 채, 마치 어제 일인 것처럼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 누군가 버리고 간 듯한 발자국이 진하게 찍힌 문예지가 하필 설양의 곁에 떨어져 있던 것도, 문학이니 뭐니 하는 속 편한 한량 짓에는 관심도 없던 그가 본능적으로 잡지를 집어 들어 ‘云梦’이라 적힌 표지를 넘기고 첫 장을 펼쳐 보았던 것도, 그리고 하필 첫 장에 효성진의 글이 실려 있었던 것도, 설양은 전부 기억했다.
「雪上送年」
중국어를 잘 몰랐음에도 설양은 그 제목을 외웠다. 어떻게 발음하는지도 모르면서. 일이 끝나고 돌아가는 길이면 늘 공터 흙바닥에 앉아 조심스레 찢어 온 효성진의 소설을 꺼내 보며 나뭇가지로 흙 위에 제목 네 글자를 적어보았다. 광요는 설양에게 약간의 중국어도 알려주긴 하였으나 어디까지나 기초에 불과했으니 글을 이해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네가 신문을 읽고 싶다면 더 알려줄게.’
‘배달만 잘 하면 되지, 내가 그걸 읽어서 뭐해?’
처음으로 그는 자신의 지난 행동을 후회했다. 그때 조금이라도 배웠으면 무슨 말인지 지금보다 잘 알아먹을 수 있을 텐데. 효성진이 글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설양은 그의 글을 소중히 품고 다녔다. 주머니 속엔 언제나 꼬깃해진 종이 몇 장이 담겨 있었다.
웬 영감이랑 할멈이 나오고, 눈 위에 있다는 건 알겠는데, 나머지는 모르겠어. 결국 광요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나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평생을 함께 지낸 노부부가 가까워지는 죽음을 직감하면서 두 손을 맞잡고 하얀 눈밭을 걷는다. 그들은 과거를 추억하며 자신의 배우자가 올 한 해도 무사히 견뎌내 자신의 곁에 있음을 감사한다. 묘사는 훌륭한데, 확실히 이야기가 재미없긴 하네. 광요의 차가운 말에 설양은 괜스레 발끈했다. 네가 문학을 아냐? 그러는 넌 알고? 글도 못 읽어서 나한테 가져왔잖아. 정곡을 찔린 탓에 그는 광요 손에 들린 종이를 다시 뺏어가며 몇 번이고 읽은, 그러나 알아먹지는 못하는 글자들을 노려보았다.
“하얼빈은 또 뭐야?”
“있어, 중국에. 지금은 그 땅에 일본군이 주둔해 있을걸?”
후에 효성진을 만나고 나서야 설양은 하얼빈이라는 도시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따뜻한 날보다 추운 날이 더 많고, 겨울이면 새하얀 눈이 쌓이지 않는 곳이 없다고. 효성진은 그 많은 날 중에서도 가장 추운 1월 25일에 태어나 어머니의 허리까지 눈이 쌓였다고. 선천적으로 폐가 약한 건 워낙 추운 곳에서도 추운 날 태어난 탓인지도 모른다고. 효성진의 삶은 이사가 잦았다. 이사라고 했지만, 사실상 피난에 가까웠을 것이라고 설양은 추측하곤 했다. 걸음마를 떼기도 전에 어머니와 상하이로 떠나고, 신해혁명 탓에 온 나라가 떠들썩하여 큰 화를 입기 전에 사방을 돌아다녔다고 들었다. 그는 10대의 마지막이 되어서야 지금 이곳, 의성에 정착하였다. 효성진의 아비는 생전 위안스카이의 측근이라고 할 만한 인물이었기에 어렸을 땐 부족함 없이 살았다고도 했다. 그러나 혁명이 성공하면서 아비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어미는 슬픔을 추스를 새도 없이 자신과 효성진에게서 아비의 흔적을 지워버리기 급급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말할 때는 중국어의 조금도 쓰지 않는 인간들이 얼마나 잘난 척을 하고 싶으면 중국어로 쓴 글만 취급하는 거야?”
“정계에 한족들이 많은 걸 어쩌겠어. 그래서 신문도 전부 중국어잖아.”
의성을 수도로 두고 있는 이 국가는 공용어와 중국어를 섞어서 사용했다. 중국에서 밀려나 방랑을 하던 와중 원주민들의 땅을 발견하고 탄압하여 나라를 세운 이가 중국인이었기에 정해진 것이었다. 초기에는 그들이 유일하게 아는 언어인 중국어만을 사용할 수 있었는데 이후에는, 이후라고 해봤자 설양이 태어나기 전이지만, 혁명이 일어나 권력은 원주민들에게 돌아가게 되면서 공용어와 중국어를 혼용하게 되었다. 왜 완전히 지워버리지 않고? 여관 찻집에 앉아 설양이 그러한 걸 물을 때마다 광요는 마치 당연한 걸 진심으로 모르냐고 타박하는 듯한 눈빛을 하면서도 대답해 주었다. 지금은 사라진 왕의 자리에 오른 원주민이 친중파 인물이었으니 이 땅에서 중국인을 다 쫓아내지 못하였고, 그러니 아직도 중국인들의 정치 참여율이 높은 것이라고. 단일 민족이었던 나라에 한족이 늘어나는 건 윗분들만의 거래가 만들어 낸 결과라고. 설양은 본인의 민족이 무엇인지 정확히 몰랐으나 효성진이 한족이라는 걸 알고 나서는 본인도 한족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얼마나 단순하고 멍청한 생각인지 광요가 헛웃음을 터뜨릴 정도였다.
광요에게서 듣는 게 아닌 자기 스스로 효성진의 글을 알고 싶었던 설양은 중국어를 배울 방법을 찾았다. 예전처럼 그에게서 배우는 것도 나쁘지 않았으나 격동의 시대를 살아가는 기자란 하루 24시간이 모자란 존재였다. 남의 눈치나 사정 따윈 보지 않고 사는 설양이라고 해도 광요를 붙잡고 중국어 수업이나 진행하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다른 이에게서 배우기엔 비용이 문제였다. 골똘히 생각에 잠긴 얼굴로 며칠간 바삐 신문을 배달하던 설양은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광요를 찾아갔다.
효성진의 작품을 실었던 문예지에 연락해 작가님에게 편지를 보내고 싶으니 주소를 알려달라 요청하라니, 수화기를 들면서도 광요는 설양의 생각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전화를 받은 이는 효성진, 이라는 이름을 언급하자마자 무척이나 반가워하며 당장 주소를 읊어주었다. 너무 빨리 말한 탓에 받아적을 순간을 놓쳐 다시 한번 말해달라고 부탁해야 했다.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으려던 광요를 붙잡고 효성진이 자신의 외숙인데 정말 좋은 사람이고, 누구보다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인데 이렇게 독자가 연락을 한 건 처음이라며, 어떻게 이럴 수 있냐는 장황한 이야기들을 늘어놓았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광요의 얼굴 위에 피로가 가득해서 설양은 그가 조금은 안쓰럽게 느껴졌었다. 광요는 설양이 있는 쪽은 쳐다도 보지 않고 고이 접은 쪽지 하나를 건네주었다. 급하게 휘갈겼음에도 바른 글씨를 보며 설양은 그는 진정으로 꾸준히 재수 없는 놈이라고 생각했다.
쪽지에 적힌 주소 하나에만 의지하여 온 동네를 돌아다녔다. 議場, 과거 중요한 나랏일을 회의하던 곳이어서 동네의 이름이 그리 지어졌다고 했다. 그래 봤자 이미 왕정이 무너지고 모든 주요 기관은 의성의 한 가운데에 몰려버린 지금은 그저 햇빛이 들지 않는 어둡고 음침한 빈민촌일 뿐이었다. 정확히는 빈민촌이라 칭하기엔 어폐가 있었고, 대도시 의성에 위치한 동네답게 그 안에서도 빈부격차가 여실히 드러났다. 가난한 이들은 집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곳에 몸을 뉘었고, 그나마 가진 이들은 집 구실은 하는 건물로 들어갔다. 설양이 찾아간 곳은 그래도 집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가난한 문학인의 삶이란 이런 것인가, 사회주의를 찬양하는 소설 몇 권을 내고 번 돈으로 사치를 부리던 자들만 봐 온 설양에겐 효성진의 집이 낯설었다.
잠시 숨을 길게 내쉰 후 오른손을 들어 현관문을 두어 번 두드리자 금세 안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네, 하는 나긋한 목소리에 설양은 심장이 제지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뛰는 걸 느꼈다. 소매치기를 들켜 두들겨 맞기 전에도 이렇게까지 긴장하진 않았다. 만나면 무슨 말을 가장 먼저 하려고 했더라, 문이 느리게 열림과 동시에 설양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저보다 조금 더 높은 곳에서 의아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다정한 시선에 그는 멍하니 입술만 벌렸다.
“어쩐 일로 찾아오셨나요?”
더운 여름날, 설양은 마치 첫눈을 본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당신의 글이 좋아서 찾아왔다는 소년을 매몰차게 돌려보낼 만큼 효성진은 차가운 인간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말에 진심으로 기뻐하며 환하게 웃어주었다. 글에 대한 당신의 이야기가 듣고 싶다고 하자 효성진은 기꺼이 설양을 데리고 근처 다방으로 향했다. 목재로 지어진 벽에는 온갖 바다 건너 이름 모를 나라들에서 수입해왔을 것만 같은 장식들이 가득했다. 커다란 LP판이 턴테이블 위에서 유유히 돌아가며 감미로운 피아노 소리를 흘려보냈다. 배경음악과 어우러지는 사람들의 말소리는 마치 이곳이 다른 세상인 듯한 분위기를 자아내었다. 지금껏 설양이 살아왔던 구차하고 시끄럽던 세상은 그의 꿈속에나 존재하는 것처럼.
커피 한 잔과 우유 한 잔을 탁자 위에 올려두고 둘은 초면이라는 단어가 무색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잡지사에 전화해서 주소를 물어보니 신나서는 바로 알려주던데요. 당신이 자기 외숙인데 문학을 사랑하는 좋은 사람이라고 했어요. 그 말을 직접 들은 건 광요였으나 그 남자의 목소리가 워낙 큰 탓에 곁에 서 있던 설양에게도 아주 생생하게 잘 들렸었다. 민망할 정도의 칭찬을 전해주자 효성진은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아선이 그런 말을 했나요? 별 볼 일 없는 외숙을 너무 고평가해주었네요. 그건 그렇고, 이 글에 대해 이야기해주세요. 雪上送年은 제 생일날 쓴 글이에요. 제가 태어난 곳이 소설에 등장하는 하얼빈이라는 도시인데, 겨울이면 눈이 많이 쌓이거든요. 사실, 워낙 어릴 때 떠나서 자세한 기억은 없지만, 어머니의 품에 안겨 새하얀 집 주변을 둘러보았던 건 신기하게도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더라고요. 그 풍경을 떠올리면서 썼어요. 과묵해 보이는 인상과는 달리, 효성진은 쉴 새 없이 작은 입을 조잘대며 제 글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사내이니 입술에 연지를 발랐을 리는 없을 텐데, 어찌 저리 붉을까. 설양은 그 입술이 움직일 때마다 좋은 향기가 짙게 풍기는 듯한 환후도 느껴졌다.
서양식 복장을 몸에 두르고 삼삼오오 모여 앉아 커피에 각설탕을 빠뜨리는 이들 사이에서 효성진은 단연 돋보였다. 안에 있는 누구보다 외모가 아름답기도 했으나 그는 셔츠 같은 걸 입고 있지 않았다. 하물며 설양도 입고 있는 것을. 그 옷은 뭐예요? 설양이 호기심에 묻자 성진은 자신이 살던 나라의 전통 의상을 수선한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아마도 치파오, 라는 이름으로 불렀을 것이라고 설양은 기억했다. 거리에 나가면 볼 수 있는 여인네들이 입는 치마와 비슷한 모양새의 그것은 효성진의 얇은 발목까지 가릴 수 있을 만큼 기장이 길었다. 해가 쨍쨍한 낮이었음에도 그는 얇은 외투까지 걸쳐 입고 있었다. 타고나길 몸이 차가워서 어쩔 수 없다고 했다. 그럼 오늘처럼 더운 날엔 고생스럽겠네요, 우유를 한 모금 홀짝이며 묻는 설양의 말에 효성진은 고개를 저었던 것 같다. 하긴, 여기까지 오는 동안 틈만 나면 손등으로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내던 설양과는 다르게 효성진은 통이 넓은 겉옷의 소매 안에 제 손을 집어넣고 절대 꺼내지 않았으니까, 설양은 그 손을 잡을 수 있게 되고 나서야 왜 효성진이 여름에도 긴 옷을 입어야 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이 보지 못한 당신의 글을 더 읽고 싶다고 하자 효성진은 흔쾌히 설양을 자신의 집에 데려갔다. 경계심이 이리도 없을 수 있나, 내가 이상한 놈이면 어떡하려고. 효성진에게 아직 성인도 되지 않은 설양이 얼마나 어려 보였는지는 당시의 그가 알 리 없었다. 집안은 허름했다. 군데군데 낡은 건 둘째치고 최소한의 필요한 가구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놓여 있지 않았다. 장롱을 열어 이불을 보관하는 칸 아래에 쌓인 종이를 들고나온 성진은 정말 마음에 드는데 문예지에 보내지 못한 글이라며 세 장을 골라내어 설양의 손에 쥐여주었다. 그러나 무작정 효성진을 만나는 것만 생각하고 온 설양은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히게 되었다. 자신은 처음 만난 효성진의 글도 혼자서 읽지 못해 광요에게 도움을 요청했었다는 걸, 완전히 잊고 있었다. 글씨란 본래 쓰는 자의 성정을 닮는 것인지 잉크 하나 번지지 않고 깔끔하게 쓰인 글자들은 전부가 중국어였다. 설양의 얼굴에 당황하는 기색이 만연해지자 그를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던 효성진의 얼굴 위에도 의문이 드리워졌다.
“무슨 일이죠?”
저를 빤히 쳐다보며 묻는 효성진에게 설양은 거짓말을 할 순 없었다. 사실은, 제가 중국어를 잘 몰라요. 雪上送年도 제 친구한테 물어봐서 겨우 알아먹었어요. 말을 할수록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는 설양이 지금 꽤나 위축된 상태라는 걸 알려주었다. 누군가의 앞에서 긴장을 한 것도, 자신감이 사라지는 것도 전부 처음이었다. 못 배워 먹었다는 비난을 들어도 고개 빳빳이 치켜들고 다니던 설양은 효성진 때문에 낯선 것들을 너무나도 많이 겪었다.
“그럼, 제가 알려드릴까요.”
“뭐라고요?”
생각지도 못한 제안에 설양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제 글이 좋다며 여기까지 찾아와주신 소중한 독자 분인데, 언어가 장벽이 된다면 제가 너무 슬플 것 같아요. 눈동자를 굴리며 잠시 고민에 빠져 있던 설양은 이내 괜찮은 생각이라도 떠올랐는지, 광요에게 문예지로 연락을 취해달라고 부탁했을 때와 같은 표정을 지었다. 어딘가 익살스럽고 짓궂으면서도 상대가 거절할 수 없도록 동정심을 한껏 두른 표정을.
“그리 해주시면 저야 고맙죠. 그런데….”
이야기를 더 잘 듣기 위해 몸을 가까이하는 효성진을 보며 설양은 눈썹과 눈꼬리를 한껏 내린 채 말을 이어나갔다.
“제가 지낼 곳이 마땅치가 않아서요. 지금 겨우 눈을 붙이는 곳도 여기서 한참 가야 나오는 곳에 있고, 금방 나가야 합니다.”
“아… 그러셨구나.” 설양의 말이 거절의 의미인 줄 착각한 효성진은 그리 티는 나지 않았으나 살짝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선을 긋기 전에 설양은 다급히 다음 말을 꺼냈다.
“그래서 말인데, 저도 여기서 함께 지내도 될까요?”
저희 집에서요? 뜬금없는 부탁에 효성진이 짐짓 난감한 반응을 보이자 설양은 손을 뻗어 그의 긴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애처로운 연기를 하는 손끝이 가증스러웠다. 사는 곳이야 원한다면 언제든지 찾을 수 있었다. 전처럼 깡패짓이라도 하여 빼앗을 수도 있었고, 광요에게 부탁해 아무 집이나 구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설양은 팔자에도 없는 남에게 빌붙어 사는 걸 택했다. 제아무리 선한 인물이라 하여도 오늘 처음 만난 아이를 대뜸 집에 들여 식구로 맞이하는 건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니었다. 당장 살림이 늘어난다면 허리띠를 얼마나 졸라매어야 할지도 모르는 노릇이었으니 당연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효성진은 이성적인 사람이었으나 자신의 글이 좋다며 찾아온 어린아이를 내칠 수 있는 만큼의 단호함은 없는 위인이었다.
“…… 저는 원체 재미가 없는 사람이라, 지내시다 보면 지루해서 오히려 나가고 싶어지실 겁니다.”
“같이 살아도 된다는 뜻인가요?”
“원하는 대로 하세요. 대신, 글공부는 열심히 하셔야 합니다.”
성진의 허락에 설양은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효성진 홀로 조용히 하루하루를 마무리하던 그 낡은 집에는 어느덧 활기찬 웃음소리와 말소리가 도란도란 울려 퍼졌다.
그날 의성엔 모처럼 빗방울이 떨어졌다. 긴 장마가 시작되었다.
뼈가 빠질 듯이 손을 뻗어도 하늘 위, 별에는 닿을 수 없다.
나는 이 당연한 사실을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겨우 인정할 수 있었다.
나는 아직도 이리 어리석다. 해가 뜨면 별은 보이지 않는다는 걸 인정하지 않고 외면해버릴 만큼.
함께 지내는 동안 가까이서 지켜본 효성진은 설양에게 있어 정말이지, 세상에서 가장 희한하게 느껴지는 자였다. 정이 조금 많을 뿐인 현실주의자인 줄 알았으나 세상에 대해 말하는 걸 듣고 있으면 말도 안 되는 허상에 취해 있는 듯했다. 그러나 허공을 유랑하는 이상주의자라고 칭하기엔 그는 또한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이상을 꿈꾸면서도 욕심내지 않았다. 얼마 받지도 않는 인세는 새 종이와 잉크, 그리고 소액의 생활비로만 쓰였다. 가끔 심부름을 다녀온 설양에게 사탕 몇 개를 주는 것을 제외하면 쓸데없는 소비도 없었다. 효성진의 주머니는 가벼웠으나 그의 마음은 가볍지 않았고, 현실을 직관할 줄 알았으나 손은 이상을 써 내려가고 있었다. 의외로 가차 없이 구는 단호한 면이 있구나, 라고 생각할 때면 어느덧 세상 위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고 있었다. 집세를 받으러 온 집주인이 팔리지도 않는 글은 잘 써지냐고 비아냥거려 설양이 그에게 화를 내면, 그래도 심성이 나쁜 자는 아니라고 말해주는 효성진은 본인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온전히 글에 녹여낼 줄 아는 사람이었다. 새벽 산책에서 몇 번 마주친 강아지가 오늘 자신을 알아보고 먼저 다가온 일을 효성진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대신 바른 자세로 앉아 사람 간의 정과 기억에 관한 이야기로 빗대어 써 보였다. 만년필을 쥔 곧게 뻗은 손가락은 얼핏 보면 고생 한 번 한 적 없는 도련님의 그것이었으나, 가운뎃손가락 마디에 박힌 굳은살은 그가 얼마나 많은 작품을 써왔는지에 대한 증거였다. 비 오는 날 실수로 밟아 옷 밑단을 다 적신 웅덩이조차 효성진에겐 우연과 실수, 그리고 업보에 둘러싸인 세상을 표현할 수 있게 해주는 소재가 되었다.
글을 통해 성진이 보여주는 세상은 어디까지나 그의 이상이 투영된 자연, 또는 그 속의 평화로운 인간사가 전부였다. 돈을 벌고 싶다면 개나 소나 다 한다는 사회주의 설파, 공산당 지지, 조국 찬양 등은 절대로 자신의 글에 담지 않았다. 그가 작품성이 뛰어난 것들을 써도 가난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문학이란 결국 당시의 시대상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기능한다. 그러나 효성진의 글에는 혼란스러운 정세, 사치에 물든 중산층, 거품이 부풀 대로 부풀어 버린 부동산과 같은 건 비유적 표현으로라도 절대 등장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이상만을 얘기했다. 어째서 그러는 것인지 이유는 듣지 못했지만, 설양은 효성진이 그렇게나마 복잡한 현실로부터 도피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어쨌거나 독자의 선호를 맞추지 못하였으니 다른 문예지에서 그의 글을 실어주는 건 불가능했다. 외조카인 위무선이 편집자로 일하는 문예지에만 비정기적으로 원고를 보내 조금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다였다. 무선은 설양이 등장하기 전, 세상에서 가장 제 외숙의 글을 사랑하던 이였다. 마음만 같아서는 인세를 대폭 높여 그가 더 풍족한 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었으나 사회는 낭만을 잃었고, 낭만이 사라진 도시에서 예술은 사상 전파의 수단 그 이상으로도, 이하로도 쓰이지 못했기에 바람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무선의 아쉬움을 들을 때마다 성진은 두 손을 내저으며 신경 써주는 마음씨만 고맙게 받겠다고 했다. 그는 정말로 제 글이 잘 팔려 돈을 어마어마하게 번다고 하여도 받지 않을 사람이었다. 그만큼 물욕 없이 유유자적이 신념과 꿈을 유지한 채 살아가는 자였다. 효성진은 사상이나 이념의 정립, 애국 또한 중요하지만, 이론과 맹목적인 지지 같은 것에만 매달리면 정작 가장 중요한 건 볼 수 없게 된다고 늘 설양에게 이르곤 했다. 설양은 그의 당부가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효성진이 그러면 안 된다고 하니 그저 알겠다고 고개만 끄덕였다. 효성진의 세상이 사상 대립도, 전쟁도 없이 모두가 평화와 정의를 꿈꾸는 이상이 전부였던 만큼, 설양의 세상은 효성진이 전부였으니 그는 제 스승의 말을 따를 뿐이었다.
설양은 가끔씩 자신의 유일한 친구인 광요를 만났다. 효성진에게 글을 배우기로 하자마자 신문 배달부 같은 건 때려치웠으니 신문사에 찾아갈 일은 그것 외엔 없었다. 설양의 얘기를 들을 때마다 광요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팔리지 않는 소설가의 뮤즈라도 되고 싶은 거냐고 물었다. 그럴 때면 설양은 너 같은 기업의 부품이 뭘 알겠냐며 고개를 저었다. 광요는 너에게 처음 글을 가르쳐주고 사람 구실 하게 만들어준 건 난데 은혜는 엄한 데다가 갚냐고 농담으로 타박하곤 했다.
“꿈에서나 그리던 효성진 작가님은 어때.”
“말해 뭐해. 최고지. 사람이 저럴 수가 있나, 싶을 만큼 착해. 가끔 보면 좀 바보 같아.”
“너 그 작가 많이 좋아하는구나? 칭찬밖에 안 하는 거 보니까.”
그의 말에 설양은 자신의 스승이 그러하듯이 그저 웃었다.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고. 침묵이 곧 상황을 옳게 정리할 때가 있다는 가르침을 기억한 행동이었다.
광요가 예상했던 대로 설양의 머리는 비상했다. 성진은 가르쳐주는 족족 이해하고 습득하는 첫 제자가 사랑스러웠다. 쪽지시험이라도 다 맞으면 달달한 사탕을 하나씩 주었는데, 그때마다 반짝이는 눈동자 속엔 기대와 성취감이 잔뜩 녹아 있었다. 이런 뿌듯함에 기대어 가며 다들 자식을 키우는 걸까, 라고 성진은 자주 생각하곤 했다. 효성진이 일부러 어려운 단어들을 잔뜩 집어넣어 쓴 원고를 무리 없이 읽고, 감상평까지 중국어로 잘 말할 수 있게 된 설양은 어떻게든 성진의 곁에 더 남아 있고 싶어서 핑곗거리를 찾기 시작했다. 집안 살림엔 서투르시잖아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라며 집안일을 도맡아 하던 설양은 제 두 손을 잡으며 그러지 말라고, 너에게 이런 일을 시키려고 글을 가르쳐준 게 아니라고 진중하게 말하는 효성진에 의해 금방 가정부 노릇을 관두어야 했다.
이 사람이 쓴 소설을 읽을 수 있도록 중국어를 배우고 싶다고 생각했고, 그 목적은 충분히 이루어냈으나 설양은 효성진의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함께 살지 않는다 하여도 네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만날 수 있어, 그리 달래주어도 마냥 철없는 어린아이처럼 가기 싫다며 생떼를 부리고 싶어졌다. 어딘가에 머무르는 법이 없고 넓디넓은 도시를 떠돌아다니며 아무 데서나 어떻게든 살아가는 게 설양이 인생을 보내는 방법이었고, 그것이 당연하게 자리 잡은 지는 꽤 오래되었다. 여관 주인에게 붙잡히고, 광요의 신문사에서 배달부 일을 하느라 설양으로서는 긴 시간 동안 이 근처에 머무르게 되었던 것이지, 아마 효성진을, 그의 글을 만나지 않았다면 얼마 안 가 역마살이라도 낀 사람처럼 다른 곳으로 떠났을 게 분명했다. 그러나 설양은 적어도 이번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아무런 미련도 없다는 듯이 의장議場을 떠날 수 없었다. 머물러 있던 몇 개월간, 이 낡은 집에 너무나도 많은 것들의 씨앗을 심어버렸기 때문이다.
설양은 효성진의 글을 사랑했다. 허황된 꿈을 품는 게 어리석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은 아마 평생 갖지 못할 그만의 상냥한 시선이 좋았다. 저 시선 속에서 난 어떻게 보일까, 그것이 무척이나 궁금하여 어느 날은 장난처럼 나를 보고 영감을 받아 글을 쓸 수는 없겠냐고 물어도 보았다. 돌아온 대답은 그저 멋쩍은 미소 한 번이 전부였다. 거절이나 마찬가지여서 설양은 그때의 효성진이 지어 보였던 미소를 떠올릴 때마다 조금 시무룩해졌다. 글감은 주변에서 찾는다고 하더니, 어째서 항상 주변을 맴도는 나를 주제로 한 글은 써주지 않는 걸까, 그런 의문이 며칠째, 몇 주째, 몇 달째 이어지니 설양은 알아차리고 만 것이다. 효성진에게 품고 있는 감정은 무엇인지, 감히 스승에게 어떤 불순한 마음을 품은 것인지,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게 된 것이 과연 효성진의 손에서 탄생하는 그의 문학인지, 아니면 그 자체인지에 대한 대답을 말이다. 난생처음 느껴 본 간지럽고, 따뜻하고, 연약하면서도 부서지지 않을 것처럼 단단하고, 가슴을 저리게 하면서도 포근하게 하는 그런 감정은 전부 이 가난한 문인의 집에 뿌리를 내렸다. 성진의 글 속에서 설양은 주인공도, 하다못해 어떠한 대상도 되지 못했다. 그것이 효성진이 저에게 선을 긋는 일종의 방식이라는 건 시간이 많이 흐르고 난 뒤에 깨달을 수 있었다.
더 제 마음에 드는 다른 글도 있다고 알려주었지만, 그래도 설양이 가장 좋아하는 성진의 글은 변함없이 雪上送年이었다. 무엇이든지 처음이라는 건 큰 의미를 가지게 되니까, 라며 못 말린다는 듯 웃는 효성진은 아마 꿈에도 모를 것이다. 눈밭을 걸으며 함께 했던 평생을 추억하는 노부부의 모습에 설양이 얼마나 자주 자신과 효성진을 투영하였는지를. 설양이 영원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 사람이 본인이라는 것을. 그가 자기도 문학을 배우고 싶다고, 글을 쓰고 싶다고 효성진에게 나지막이 부탁한 건 어찌 생각해 보면 당연한 절차였다. 아마도 이른 시일 내엔 고백하지 못할 게 분명한 마음을 뱉어날 곳이 설양에게도 필요했기 때문이다. 효성진은 글로서 세상을 바라보니 마찬가지로 그의 제자인 설양도 글을 통해 저의 세상을 바라보고 표현하고 싶었다. 효성진으로 가득 찬 저의 세상으로 원고지를 채우고 나면 이 격렬한 감정이 조금은 진정될 것 같았다.
설양은 성진의 것이 아니라면 그 누구의 글도 궁금하지 않았으나 글을 쓰고 싶다면 먼저 읽을 줄 알아야 한다는 효성진의 완고한 주장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누군지도 모르는 이들의 시집과 단편집을 펼쳤다. 코웃음을 치게 만드는 인세를 받는 날이면 효성진은 어김없이 서점으로 가 낡은 문학책들을 사서 설양에게 주었다. 모르는 말이 있으면 언제든지 물어봐도 좋아. 읽고 나서 꼭 너만의 문장으로 감상평을 써야 해. 효성진은 매일 같이 숙제를 내주었고 설양이 문학을 더 사랑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문하생으로 받아달라는 설양의 부탁에 자긴 누군가를 앉혀 두고 가르칠 만큼 견문이 넓지 않다고 손사래를 치더니 중국어를 가르칠 때보다도 열정이 넘쳐 보였다.
‘세상천지를 다 뒤져본다고 해도 우리 외숙만큼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효성진이 아선, 이라고 부르던 문예지 편집자의 말은 잊힐 만하면 꾸준히 설양의 머릿속에서 떠다녔다. 그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자라면 그런 건 말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듯했다. 의사가 되라는 어머니의 유언까지 어겨 가면서 문학을 공부했다더니, 효성진이 활자를 사랑하는 마음은 누가 뭐라 해도 티끌 하나 묻지 않은 진심이었다. 내가 비집고 들어갈 자리 같은 건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었지, 그는 한참이 지난 후에 그 사실을 깨달은 본인이 눈물이라도 날만큼 멍청하게 느껴졌다. 설양은 표지가 다 헤져 떨어지고 모서리가 닳을 때까지 효성진이 저에게 쥐여준 책들을 읽었다. 그렇게나마 그를 향한 제 성의를, 그리고 마음을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당신이 내게 사하는 호의를 난 절대 가벼이 넘기지 않는다고, 사랑을 가득 주어놓고 언제나 당신을 상처 입히는 세상과는 다르다고. 그러나 이 모든 게 효성진의 마음 깊숙한 곳 어디에도 설양이 품는 감정과 비슷한 종류의 무엇도 심어주지 못했다는 걸 설양 스스로가 겨우 인정해야만 했을 때, 그는 스승의 죽음에 버금가는 절망감을 느꼈다.
제 감정을 인식하고 나서도 설양은 자주 궁금증을 품었다. 난 효성진의 무엇을 보고 이리도 아픈 길을 걷겠다며 다짐하였나, 질문의 대답은 효성진이 영영 떠나버린 지금도 윤곽 하나 잡히지 않았다.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보니 혼자서는 도무지 사랑의 원인을 파악할 수가 없어서 효성진에게 스리슬쩍 물어보았던 때가 떠올랐다. 스승님, 궁금한 거 있어. 그때쯤 설양은 이미 말을 놓은 지 오래였는데 스승님이란 호칭은 절대 빼먹지 않았다. 성진은 설양이 자신을 스승님, 따위의 명칭으로 부를 때마다 민망하여 살짝씩 볼을 붉히곤 했다. 무엇이 궁금하니, 아양. 읽던 책을 무릎 위에 내려놓고 다정히 귀를 열어주는 효성진의 자태는 다시금 생각해 보아도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인간은 왜 사랑이라는 감정을 품게 되는 걸까.’
‘…… 아양, 너는 사람이 사람을 연모하는 데 이유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니?’
‘필요까진 아니어도, 어느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아? 아무런 이유도, 계기도 없이 사랑에 빠질 수가 있어?’
‘그건 당사자가 아닌 이상 모르지. 그렇지만, 난 사랑에 굳이 정당성이 부여되어야 한다고 보진 않아. 어차피 개인의 감정 같은 건 타인은 평생이 흘러도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고, 그러니 아무리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이유, 그러니까 맥락이 있다고 해도 모든 걸 납득할 수는 없거든.’
‘스승님은 누군가를 사랑한 적 있어?’
그 물음에 효성진은 무어라고 대답을 해주었지, 아마도 예의 그 멋쩍은 미소를 다시 지으며 이야기를 다른 데로 돌렸을 것이다. 처음엔 마음속에 품은, 혹은 품었던 이가 분명히 있는 것이라고 여겼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세상 누구도 효성진에게 그의 연인으로서 사랑을 받은 적이 없다고 여기는 쪽이 더 맞는 듯했다. 저 자신의 이상으로 채워진 세상과 문학을 사랑하느라 땅 위를 밟고 있는 그 어떤 이도 사랑해주지 않은 효성진은 지나치게 공평한 인물이다. 그에게 있어 특별한 존재이고 싶었던 설양의 바람이 산산조각이 날 정도로.
추운 날 추운 곳에서 태어난 효성진은 폐를 비롯한 기관지가 모두 선천적으로 좋지 못했다. 그나마 햇살이 따뜻한 여름에는 괜찮았으나 점점 날이 쌀쌀해지는 계절에 들어설수록 기침이 심해졌다. 예전에는 이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장마가 끝나고 나서도 툭하면 내리는 비 때문인지 집안에는 찬 공기가 가득한 날이 많아졌다. 만년필을 잡고 글을 쓰다가도 쿨럭이는 기침이 끝나지 않을 것처럼 길게 이어지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잔뜩 힘을 주고 잡은 만년필의 펜촉 끝에서 잉크가 한 군데에 뭉쳐 결국 얼마 쓰지도 못한 종이를 새로 갈아야 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예전에는 이 정도로 심하진 않았는데…. 홀로 중얼거리는 효성진의 목소리에 기운이 하나도 남지 않은 것 같아서 설양은 가끔 두려움이라는 걸 상상했다. 무서울 것 없이 살아온 설양의 인생에 효성진은 또 다시 새로운 걸 가르쳐주었다. 효성진의 다정을 사랑하던 설양은 어느 순간부터 그의 다정을 원망했다. 숨이 모자랄 때까지 기침을 뱉는 와중에도 어두운 밤에 작은 촛불 하나만 켜둔 채 효성진이 사준 소설을 읽는 설양의 눈이 나빠질까 등불을 선물해주는 다정함에 설양은 하루하루 침식되었다. 이에 길들어지면 어느 순간 그가 사라지고 나서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지, 이미 알아버린 다정을 어떻게 잊으며 살지. 설양에게 효성진은 당장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유약해 보이다가도 雪上送年에 나오는 노부부처럼 평생을 함께해 줄 사람 같기도 했다.
설양은 더 이상 독자의 위치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어설프게 깎은 몽당연필을 쥐고 휘날리듯이 글을 써 내려가는 엄연한 창작자가 되었다. 연필심 끝에 침을 묻혀가며 쓰다가 오탈자라도 생기면 새 종이를 꺼내는 스승과는 반대로 그 위에 아무렇게나 연필을 죽죽 그어 지워버리고 옆에 올바른 글자를 적었다. 책상 앞에 몇 시간이고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채 글을 쓰는 효성진과는 달리 설양은 그때그때 편한 자세를 취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거실에 드러누워 쓰기도 했고, 바닥에 앉은 채 침대를 책상처럼 사용하며 쓰기도 했다. 한 자리에 오래 앉아 있지 못하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그가 꼭 심심한 강아지들 같다고 효성진은 자주 생각했다. 그렇게 정신 사납게 완성한 첫 작품을 읽은 순간 효성진은 설양에게서 재능을 보았다. 설양은 자기가 글을 완성할 수 있었던 건 다 효성진 덕분이라며 고했지만, 그는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래도 내가 호랑이의 자식을 키운 듯해. 어쩌면 나보다 더 훌륭하고 유명한 문학인이 될지도 모르겠구나. 설양은 성진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최고는 언제나 효성진이었으니 저가 그를 넘어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의 범주였다.
난 훌륭한 문학인 같은 것이 되고 싶은 게 아니야. 그저 이 허름한 지붕 아래에서 당신이랑 오래오래 살고 싶어. 그게 다야. 그 노부부처럼, 하얀 눈밭을 걸으며 각자의 기억 속에서 예전의 서로를 추억할 수 있으면 그걸로 충분해. 물론 이를 효성진에게 곧이곧대로 전할 수는 없었으니 설양은 기특하다며 제 머리를 쓰다듬는 효성진의 가느다란 손의 감각을 가만히 느끼는 것으로 말을 삼켰다.
처음 입주했을 때부터 집의 상태는 빈말로라도 좋다고 말할 수 없긴 했으나 효성진이 기침을 토해내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집 또한 함께 상태가 나빠지기 시작했다. 새벽 일찍 눈을 뜨자마자 상체도 일으킬 새 없이 콜록거리는 동안 창문을 부술 듯이 내리치던 비에 의해 벽이 안쪽까지 죄다 젖어버려 곰팡이가 피었고, 그나마 가장 싼 값에 치료를 받을 수 있는 병원을 찾느라 한참을 돌아다니다 결국엔 실패하고 돌아온 날이면 거실 바닥에 그리도 많은 벌레가 기어 다녔다. 그것들을 모조리 잡느라 설양은 무려 삼십 분을 써야 했다.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남겨주고 간 집이라 자신의 목숨과도 같다더니, 진짜로 효성진의 목숨과 연결고리라도 있는 듯했다. 그래도 이 동네에선 조금 사는 편에 속한다고 생각했던 집은 어느덧 빈민들의 것과 크게 다른 바가 없어 보였다. 사실 설양은 집 같은 건 어찌 되어도 좋았다. 효성진이 아끼는 게 망가지는 걸 원한 건 아니었으나 집 같은 건 언제든지 구할 수 있었다. 설양은 여전히 광요와 틈틈이 만남을 갖는 사이였고 최근 그의 직급이 높아졌다는 소식까지 들었으니 그 틈을 타 도움을 요청하면 광요는 귀찮다는 듯이 굴어도 결국 손을 뻗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새집은 내 친구에게 부탁하면 금방 구할 수 있어, 라며 이사를 권하기도 했으나 효성진은 은근히 고집이 셌다. 자기가 원해서 대학교 문학부에 입학하기를 선택해놓고 내심 의사가 되라는 어머니의 유언을 지키지 못한 걸 아직까지 신경 쓰는 사람이니 그녀의 마지막 흔적이나 다름없는 이 집을 버리는 게 가능할 리 없었다. 격동의 30년대를 지나 혼란의 40년대에 들어설 때까지도 그들은 오래된 집에서 나란히 몸을 뉘며 살았다.
병원비를 댈 형편은 되지 못했으니 설양이 효성진에게 해줄 수 있는 거라고는 약국으로 달려가 기침약을 사와 그에게 먹이는 것 외엔 없었다. 찬 기운에 장시간 노출되어 잠깐 아플 때 먹는 거라는 약사의 설명은 수없이 들었으나 그 약이라도 먹이지 않으면 정말 효성진이 쓰러질 것만 같았다. 저보다 키도 더 크고 체구도 작지 않은 사람인데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어깨를 들썩일 때면 누구보다 약한 이처럼 보였다. 안 그래도 하얀 피부는 날이 갈수록 창백해졌고, 입이 짧아 음식을 많이 먹지 않는 그는 점점 입맛을 잃어 몇 숟갈도 뜨지 않고 밥그릇을 내려놓았다. 연지를 바른 것처럼 붉던 입술에는 색이 많이 빠지고 있었다. 약을 먹이고 가만히 침상에 눕는 효성진을 보고 있으면 어찌할 새도 없이 그가 자신을 떠나버릴 것만 같아 설양은 두려웠다. 어느덧 설양에게 두려움이란 감정은 무엇보다 친숙한 것이 되었다. 해가 뜨면 힘없이 일어나는 효성진을 대뜸 뒤에서 끌어안기도 했다. 품 안 가득 그를 담고 있으면 그래도, 사라지지 않을 거라는 허무맹랑한 기대감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그럴 때마다 효성진은 늘 그랬듯이 다정을 베풀어주었다. 몇 번이고 설양을 죽였던 다정함에 기인하여 몸을 돌려 응석을 부리는 설양을 꼭 안아주곤 했다. 안길 때마다 더욱 말라가는 품이 생생하게 느껴져서 그는 평생 모르고 살 것 같았던 죄책감이라는 걸 품어야 했다. 나를 만나서 효성진이 아픈 걸까, 난 효성진을 만난 덕분에 여태껏 행복했는데, 왜 이 사람은 날 만났다는 이유로 악화된 병세만 얻은 거지? 설양조차도 이런 생각을 품었으나 효성진은 한 번도 설양의 탓이라 여긴 적이 없었다. 설양을 만난 이후로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다고도 보지 않았다.
효성진 당신이 아픈 게 다 내 잘못인 것 같아, 침대 아래에 앉아 효성진의 손에 얼굴을 파묻은 설양은 취기를 빌려 눈물을 쏟아내며 맨정신이었다면 자존심 탓에 절대 말하지 않았을 자신의 죄책감을 전부 털어놓았다. 푹 젖은 뺨을 쓰다듬으며 성진은 조용히 일러주었다. 세상일이 어떻게 될지 미리 아는 사람은 없어. 너를 만나지 않았다고 해도 난 결국 이맘때쯤 서서히 전보다 더 아프기 시작했을 거야. 그러니 자책하지 마렴. 네 잘못은 하나도 없어, 아양. 설양은 부끄럽게도 그런 상황에서조차 효성진의 위로에 기대었다. 잦은 기침 때문에 잔뜩 부어버린 목으로 애써 네 탓이 아니라 속삭여주는 그에게 자꾸만 의존하려 들었다. 진짜로 당신이 없으면 난 어떻게 살아야 하지, 떨리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고개를 든 설양은 자신을 향해 희미하게 웃어 보이는 효성진이 너무나도 아팠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어서 가슴이 죄다 무너지는 듯했다. 설양의 첫사랑은 그렇게 세차게 내리는 빗속에서, 흐려져만 가는 효성진의 눈빛 속에서 더욱 진해져만 갔다.
설양이 눈물을 쏟아내며 속죄한 밤에 효성진의 입에서는 거센 기침 소리에 더불어 기어이 선혈이 토해졌다. 흠뻑 젖은 낡은 천장에서는 빗물이 한 방울씩 떨어져 바닥을 물들였다.
하염없이 내리는 비가 별이 내는 소리를 가릴까,
소란스러운 세상 속에서 탁한 구름이 나의 별을 숨겨버릴까 겁이 났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 설양은 기본적으로 큰 관심이 없었다. 장제스의 국민당으로부터 후원을 받는 인민당 소속 국회의원이 총리에 임명되었다던가, 공화당과의 연정을 시도했다가 실패했다거나, 국민들 사이에서 공산당의 편에 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자들이 늘어났다거나, 저 멀리 있는 넓은 땅에서 중국과 일본 두 나라 간의 전쟁이 시작되었다거나 하는 모든 일을 설양은 항상 의식의 바깥으로 흘려보내었다. 이러한 것들도 전부 광요의 푸념 속에서 우연히 들었을 뿐이었다. 예전보다 만나는 횟수는 줄었으나 그들은 여전히 주말이면 다방에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눌 사이는 유지하고 있었다. 근 3개월 만에 얼굴을 본 날, 광요는 피곤한지 미간을 좁힌 채로 커피를 마시며 설양에게 신문을 한 부 건네주었다. 이건 뭐하러 줘? 나보고 읽으라고? 처음 받은 날 황당해하며 물어보자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너 읽으라고 주는 거 아니야. 몇 년째 널 먹여주고 재워주고 계시는 그분한테 갖다 드려. 그때까지만 해도 설양은 효성진이 의성 바깥의 일은 신경 쓰지 않는 줄 알았기에 신문을 쥐고 돌아가면서도 그저 버려야 할 쓰레기가 하나 더 늘었을 뿐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설양의 예상과는 달리 효성진은 광요가 전해 준 신문을 어느 때보다도 집중하며 읽었다. 태어난 도시 위로 세워진 일본의 괴뢰 국가 이야기를 보고 나면 평소보다 말수가 적어졌고, 자주 우울에 빠졌다. 적어도 설양이 보는 앞에서는 티 내지 않으려고 부단히도 노력하였으나 글을 쓸 때조차도 효성진만을 떠올리는 그에게 들키지 않을 리는 없었다. 그들이 사는 나라는 중국과의 연이 깊은 만큼 전쟁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난징이 일본군에게 점령당했다는 소식이 퍼지고 나선 지금이라도 일본과의 교역을 시도해야 한다는 주장과 아직은 중국을 배신하기엔 이르다며 상황을 지켜보자는 주장이 서로 부딪히는 건 일상이었다. 국민당과 공산당이 손을 잡고 일본군에 대항하며 장기화된 전쟁의 진행 상황에 대한 기사를 읽은 후에는 괜스레 우중충한 하늘을 올려다보는 일이 잦아졌다. 해를 본 일이 언제인지는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의성의 하늘에는 먹구름이 자주 끼어들었다. 왜 그렇게 하늘을 자주 쳐다보냐고 설양이 묻자 효성진은 쓰게 웃으며 복슬거리는 머리카락을 조용히 쓰다듬어주었다. 아마도 그 위로 언제 미사일이 날아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당시의 성진은 품고 있었던 것 같다. 비록 어린 시절의 일이었으나 전쟁을 직접 겪어본 그는 그것이 가져오는 참극을 알았다. 광요나 성진에게 어쩌다 들은 이야기로만 전쟁을 접한 설양보다 심려가 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효성진은 나빠져만 가는 몸을 이끌고도 꽤 길게 살았다. 이대로 가면 얼마 살지 못할 거라는 의사의 말을 비웃듯이 그가 할 수 있는 한 오래 설양의 곁에 남아주었다.
- 정계에선 하루가 멀다고 싸움이 벌어지고, 사람들은 갈수록 얄팍해져 저마다의 이익을 챙기기에 바쁜 세상이 되었다. 나쁜 아이인 척을 하지만, 사실 그 누구보다도 순수한 아이를 망가진 사회 속에 던져두고 죽을 수는 없다. 훗날, 어쩌면 멀지 않은 날에 편히 두 눈을 감기 위해서라도 나는 더 살아야만 한다.
그리 적힌 원고지의 오른쪽 위엔 1938년 1월 25일, 이라는 날짜가 적혀 있었다.
신문을 봐서 뭐 하냐고 툴툴거리던 설양은 이제 하루에도 여러 번 뿌려지는 호외를 배달부에게 동전 몇 개를 건네준 뒤 가져왔다. 내심 그가 친구를 만나고 돌아올 때면 가져오는 신문을 기다리던 효성진에겐 무척이나 좋은 일이었다. 옆에 앉아 성진이 읽는 걸 힐끔 훔쳐보던 설양은 중국어를 배웠음에도 모르는 말투성이라 금세 흥미를 잃었다. 이건 무슨 소리야? 국민당이랑 공산당이 일시적으로 손을 잡았다고 하네. 왜 손을 잡았는데? 그럼 전에는 사이가 별로였어? 설양은 별 뜻 없이 물어본 질문임에도 효성진은 늘 진지하게 너도 세상 돌아가는 건 알아둬야지, 라며 현재 중국 땅 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알려주곤 했다. 설양은 두 눈을 감고 벽에 머리를 기대며 그때 효성진이 해준 말을 되새겼다. 장제스의 국민당이 공산당을 토벌하던 와중에 일본과의 전쟁이 벌어졌고, 그다음에는 뭐라고 했었지, 설양은 관심이 없어 그의 말을 흘려들었던 걸 후회했다. 그가 해준 말, 보여주었던 표정, 들려주었던 목소리 등 전부 잊어버리고 싶지 않았는데 인간의 기억이란 한정적이어서 그 모든 걸 복구시켜주진 않았다. 효성진, 그때 뭐라고 했었어? 일본이랑 싸웠는데, 다음은 뭐야? 난 기억이 안 나. 다시 알려줘. 나지막이 중얼거렸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효성진이 떠난 이후로는 생전 그의 체온처럼 차가운 공기만이 방안을 가득 메우고 있을 뿐이었다. 종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자 모서리가 구겨졌다. 그걸 보자마자 설양은 황급히 힘을 빼며 구겨진 부분 위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 폈다. 그럼에도 한 번 구겨져 버린 종이엔 보기 싫은 흔적이 남게 되어있다. 세상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설양은 그제야 조금 알 것도 같았다. 모든 건 돌이킬 수 없구나, 이미 지나가 버린 건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이전의 모습을 찾을 순 없구나. 세상은 그렇게 정해져 있구나.
아양, 이리 와. 얼른. 산책을 다녀온 효성진은 콜록거리면서도 급한 손길로 설양을 잡아끌었다. 얼떨결에 손에 쥐고 있던 연필도 놓치고 끌려간 설양은 대뜸 장롱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라는 효성진의 말에 인상을 찡그렸다. 왜 그래? 갑자기 여길 왜 들어가? 궁금한 걸 물어보면 언제나 친절하게 알려주던 성진은 드물게 어떠한 대답도 해주지 않고 서두르기만 했다. 나중에 알려줄게, 제발, 일단은 여기 들어가. 따져 묻고 싶었으나 거친 기침 소리에 마음이 약해진 설양은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장롱 안으로 기어들어 갔다. 더, 더 안으로 들어가. 어디까지, 여기? 여기 있으면 돼? 응, 미안해. 잠깐만 그러고 있어, 효성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 현관문을 요란하게 두드렸다. 설양이 보이지 않도록 윗 칸에 있는 이불을 죄다 끌어내려 아랫 칸으로 쑤셔 넣는 효성진은 살짝 겁을 먹은 것도 같았다.
“누구시죠?”
“육군에서 나왔습니다. 문 좀 열어보시죠.”
존댓말을 사용함에도 위압감으로 가득 찬 목소리는 장 안쪽에 숨어 있는 설양에게까지 들려왔다. 본능적으로 자신이 최대한 기척을 죽여야 한다는 걸 눈치챈 그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아 숨소리 하나도 새어 나가지 않도록 했다. 이곳에 혼자 살고 계시는가요? 남자의 의심스러운 말투에 효성진은 애써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주민등록상으로도 저 혼자만 나와 있을 텐데요. 실제로도, 혼자 살고 있고요. 말하는 중간마다 기침이 튀어나와서 성진은 손등으로 입술을 살짝 가렸다.
“어디 안 좋은 곳이라도 있으신가 보네요.”
“예…. 태어날 때부터 폐가 약해서요.”
흐음, 하는 소리와 함께 남자는 효성진을 위아래로 훑었다. 키는 컸으나 확실히 소매 바깥으로 드러난 손목 등을 보아하니 뼈대도 얇은 게 힘 하나 제대로 사용하지 못할 사내 같았다. 효성진의 아귀힘은 꽤 세다는 건 아마 설양이 아니고서야 제대로 알지 못할 것이다. 성진의 뒤로 보잘것없는 거실을 둘러보던 남자는 이내 알겠다며 몸조심하라는 인사치레와 함께 집을 나갔다. 배웅을 한답시고 현관 밖으로까지 나간 성진은 방금 전 남자를 포함한 군인들의 뒷모습이 완전히 멀어지고 나서야 풀린 다리를 이끌고 집안으로 들어왔다. 벽을 짚으며 안방으로 간 그는 급히 장롱을 열고 이불을 다시 꺼내었다.
“미안해, 아양. 많이 답답했지.”
“숨 막혀 죽는 줄 알았어. 근데 왜 들어가라고 한 거야?”
설양의 질문에 성진은 도대체 무어라 답을 하면 좋을지 고민했다. 중국에 지원군을 보내기 위해 나라에서 건장한 남자애들을 징집하고 있다는 걸 어떻게 설명해주지, 흘러내리는 옆머리를 넘기며 그는 애써 별거 아니라는 듯 웃어 보였다. 특별한 건 아니고, 서류에는 내가 여기 혼자 살고 있다고 등록돼있거든. 근데 사실은 너랑 같이 사는 중인 거 들키면 안 되니까, 잠깐 숨어 있으라고 한 거야. 누가 들어도 거짓말임이 분명했다. 고작 그런 이유라면 아까처럼 꼭 무언가로부터의 위협을 피하는 것처럼 행동할 리 없었다. 겨우 그거 가지고 난리 친 거야? 들키면 안 돼? 알면서도 설양은 효성진의 거짓말을 믿어주는 척했다. 당연하지. 들키면 세금 더 내야 하는데? 진짜? 그럼 난리 칠 만했네. 장난스레 끄덕거리며 웃자 성진도 겨우 안심하며 널브러진 이불을 치웠다. 내가 치울게, 식탁에 밥 차려놨으니까 얼른 그거부터 먹어. 또 고생만 시켰네, 미안. 아아, 또 사과하면 나 집 나갈 거야. 효성진의 등을 떠밀어 밖으로 내보낸 설양은 깊은 한숨부터 내쉬었다. 육군에서 나왔다는 그 위압적인 목소리, 그리고 얼마 전 효성진이 읽던 신문에 적혀 있던 중국의 열세와 같은 글자들,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일이 전보다 잦아진 효성진, 그 모든 것들이 머릿속에서 한데 어우러져 하나의 결론을 만들었다. 나라에서 군인으로 내세울 놈들을 찾고 있구나. 효성진은 몸이 약하니 데려가지 않은 듯했다. 처음으로 그의 폐가 약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설양은 어렸고, 더러운 길바닥에서 지낼 때도 감기 한 번 걸리지 않았을 만큼 몸도 튼튼했으니 아마 눈에 띄었다면 당장 두 팔이 붙잡혀 군대로 끌려갔을 터였다. 그걸 막으려고 나보고 숨어 있으라고 한 것이겠지, 다른 나라끼리 싸우든 화해하든 별 관심도 없던 그는 이 짧은 소동 이후로는 성진이 읽고 난 신문을 집어다 저도 따라서 읽기 시작했다. 흘러가는 상황을 지켜보며 어떤 날은 바깥에 나가지 않고 꽁꽁 숨어 있기도 했고, 어떤 날은 어울리지도 않게 환자인 척을 해야 한다며 다리를 저는 연기를 하면서 밖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장님인 척 손을 앞으로 뻗어 휘휘 저을 때는 기어코 효성진에게 혼이 났다. 그런 식으로 다른 사람 놀리면 못 써. 다음부턴 그러지 마. 단호히 말하면서도 시무룩해진 설양에게 슬쩍 사탕 하나를 더 건네주었기 때문에 설양은 평생이 지나도 그를 잊지 못했다.
효성진은 설양이 쓴 글을 좋아해 주었다. 너 다운 글이라며 웃는 얼굴로, 그러나 진지한 태도로 지저분한 연필 자국이 남은 종이를 한 장, 한 장 조심스레 넘기곤 했다. 아양이 쓴 글은 시장의 아무도 모르는 뒷골목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아. 뭐야, 그게. 조금만 더 밖으로 나가면 시끌시끌한데 그러지 않아서 아무도 없는, 정말 고요한 곳에 혼자 남아 있는 것 같아. 그만큼 외로운데, 그런 감정에는 이미 무뎌질 대로 무뎌진 것 같은 느낌이야. 왜 이렇게 추상적으로 말해, 어렵게. 그야 당연하지. 난 소설을 쓰는 사람인걸. 너도 마찬가지고. 성진은 어느 순간부터 설양 또한 소설가로 취급했다. 자기가 무슨 작가냐며 설양이 손사래를 쳐도 그는 고집스러웠다.
“그런데 아양, 너 혹시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있니?”
“뭐? 갑자기 그건, 왜, 왜 물어봐.”
“여기, ‘한 송이 수선화를 보기 위해 겨울을 기다린다.’라고 썼잖아. 이 수선화가 네가 좋아하는 사람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며 퉁명스러운 말투로 부정하자 성진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양, 나한텐 솔직하게 말해줘도 괜찮긴 한데…. 말하기 싫어하는 것 같으니까 더 묻진 않을게. 그는 왜 이리도 단념이 빠를까, 더욱 집요하게 추궁했다면 홧김에 당신을 생각하며 쓴 거라고, 진실을 고백할지도 몰랐는데. 이야기의 화두를 바꾸기 위해 설양은 바닥에 앉은 자세 그대로 효성진을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효성진 넌 필명 같은 거 없어?”
“내 이름이 곧 필명이지. 그건 갑자기 왜? 하나 만들고 싶니?”
“멋있는 걸로 짓고 싶은데, 난 잘 모르겠어. 네가 지어주면 안 돼?”
“내가?”
“응. 당신이 내 스승님이잖아. 제자의 필명은 당연히 스승님께서 지어주셔야지.”
쑥스러워하면서도 성진은 귀여운 제자를 위해 깊게 고민했다. 무엇으로 짓는 게 좋을까, 너의 글을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 그런 이름이 어떤 것일까. 손수건으로 입을 가린 채 기침을 하면서도 성진의 머릿속엔 온통 설양의 필명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어차피 깊게 생각하고 물었던 건 아니었기에 가만히 지켜보던 설양은 다 닳아버린 연필을 깎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그때, 성진은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두 손을 약하게 맞부딪히며 설양을 바라보았다.
“설성미薛成美로 하자.”
“성미?”
“응. 논어에 이런 구절이 나와. ‘군자는 남의 아름다운 일을 도와서 이루게 한다.’ 거기서 따온 이름이야.”
“나한테 그런 좋은 이름 줘도 돼?”
그러자 효성진은 당연하다는 듯이 곧바로 대답했다.
“그럼. 아양이 얼마나 좋은 사람인데.”
좋은 사람, 이 말은 설양의 가슴 깊은 곳에 남아 버렸다. 말해준 이가 곁에서 사라진 이후에도 그 단어만은 사라지지 않았다. 난 좋은 사람이 아니야. 효성진, 당신 앞에서만 아무것도 모르는 착한 어린애처럼 굴었던 거지. 의장과는 멀리 떨어져 있는 기주라는 동네에 가면 내가 얼마나 도둑질을 일삼았는지, 부잣집 딸내미랑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을걸. 그런데도 난 당신한테 좋은 사람일 수 있어?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착한 아이일 수 있어? 당신처럼 세상을 아름답게만 보려는 사람이, 날 그저 좋은 사람으로만 받아들일 수 있겠어? 그러나 의문들은 무엇 하나 해결되지 않은 채 마찬가지로 마음 깊은 곳에 뿌리를 내렸다. 설양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만큼 효성진은 이상주의자가 아니었고, 가끔 함께 장을 보러 나갈 때면 본인도 모르게 드러냈던 날건달 같은 모습을 하나도 빼먹지 않고 지켜보았다는 걸 그의 숨겨진 원고들을 보고 나서야 알았다.
- 내가 감자 대신 다른 채소를 사려고 움직이는 동안, 옆이나 뒤에서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아 의아해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던 적이 있다.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그 아이를 잃어버리기도 한 것일까, 잔뜩 걱정했다. 애타게 찾은 뒷모습을 발견해 다가가려는 순간, 아이는 아까 우리에게 상태가 좋지 않은 감자만 꺼내며 터무니없는 가격을 불렀던 상인의 멱살을 쥐어 잡았다. 무어라 말을 하는 듯했으나 다른 이들의 목소리에 묻혀 자세히는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상인의 표정으로 유추하건대, 절대 좋은 말은 아니었던 듯싶다. 아이는 그때 무슨 말을 했던 걸까, 협박이라는 그런 안 좋은 행동은 어디서 배워 온 것일까, 제대로 된 보살핌을 받지 못하며 자란 탓일까, 아이는 내가 자신을 동정하는 걸 다른 무엇보다도 싫어하니 앞에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티를 내어선 안 된다. 그렇지만, 나는 그 애가 불쌍하다. 보고 있으면 갑작스레 가슴이 아파져 올 때도 있다. 내가 세상을 떠나버린 후에 아이는 어떻게 살아갈까. 부디 좋은 사람으로 살아줬으면 한다. 조금이라도 더 아이와 오래 함께 하는 것, 그리고 나는 사라져도 아이는 지금처럼 착하게 사는 것, 이 두 가지만이 내 바람이다.
효성진, 당신이 봤을 땐 어떤 것 같아. 당신 없는 몇 년간, 난 어떻게 살아온 것 같아? …… 나중에 만나면 그때 꼭 말해줘.
설양은 다 읽지 못한 원고지들을 내려놓았다. 눈물이 떨어져 잉크가 번지기라도 하면 큰일이었으니까.
- 약국에 간다던 아이가 몸에 온갖 문란한 향을 매단 채 돌아왔다. 난 색사의 경험은 없지만, 코끝에 진동하는 밤꽃향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어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는 것인가. 그 애가 내게 이런 참담한 기분을 안겨줄 리 없는데.
글씨가 조금이라도 빗겨 나가면 즉시 종이를 갈던 효성진인데, 그 종이만 군데군데 물방울이 떨어져 젖었다 마른 듯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마지막 글자는 무언가와 스치기라도 했는지 잉크가 길게 번져 있었다. 설양은 그 일을 기억할 때면 아직까지도 아찔해지는 기분을 받았다. 그날 밤은, 효성진의 고향이라는 도시처럼 하얀 눈이 수북이 쌓인 밤이었다.
집안의 문이란 문은 전부 꼼꼼히 닫았음에도 어디서 자꾸 찬 바람이 들어오는 건지 기침은 나아질 기미가 없이 더욱 심해지기만 했다. 자기 몫의 이불도 효성진의 몸 위로 덮어주고 데운 물로 적신 수건을 목덜미에 갖다 대며 애를 쓰던 설양은 결국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하여 급하게 겉옷을 입었다. 밖이 추우니 나가지 않는 게 좋다고 말하는 목소리 끝이 죄다 갈라져 원래의 형태는 알아듣지도 못할 정도여서, 설양은 잠시만 기다리라 속삭인 뒤 망설임 없이 집을 나섰다. 늦은 시간까지 문을 여는 약국은 거의 없었다. 의장 내에서는 찾지 못해 동네 밖으로 나가 한참 동안 밤하늘 아래 의성을 돌아다니던 그는 종아리가 팽팽하게 땡겨져 고통을 호소할 때가 되어서야 옅은 전등 불빛 하나를 쏟아내고 있는 약국을 발견했다. 기침할 때 먹는 약 좀 주세요. 뭐 때문에 하는 기침인데요? 약국 주인은 무기력한 얼굴을 하고 있는 여성이었다. 긴 머리는 아래로 차분하게 묶여 있었고, 품이 큰 가디건은 아무리 보아도 본인의 것이 아닌 남편이나 아버지의 물건인 듯했다. 그, 원래부터 폐가 안 좋은데, 밤이 추워서 자꾸 심해져요. 원래 그 정도까지는 심하진 않은데, 아니, 평소에도 심하긴 한데, 이러는 와중에도 효성진이 잘못되기라도 할까 걱정이 태산 같은 설양은 횡설수설 말을 내뱉었다. 다행히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을 이해한 것인지 주인은 조용히 선반을 둘러 보다가 이내 손을 뻗어 웬 약병 하나를 집었다.
“이걸 먹이고 푹 재우면 괜찮아질 거예요.”
“얼마예요?”
거기서 설양은 회상을 멈췄다. 약의 가격 같은 건 이제 와 돌이켰을 때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어서 정확히 기억이 나질 않았다. 확실한 건 그게 설령 말도 안 되게 비싼 가격이었다고 해도, 그런 짓까지 하면서 사야 할 정도의 가치는 없었다는 것이다. 급하게 나오느라 돈을 많이 못 가져왔는데, 내일 와서 나머지는 드릴게요. 안 되나요? 수중에 가진 걸 전부 내밀었지만, 주인은 받지도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지긋이 설양을 응시했다. 이럴 시간 없단 말이야, 된다, 안 된다, 빨리 말이라도 하라고, 속으로만 답답한 속을 토해내며 발을 구르는 그를 지켜보던 주인은 느린 속도로 굳게 닫힌 입술을 떼었다. 그쪽, 내 죽은 남편이랑 많이 닮았어요. 그녀의 목소리에 담긴 짙은 외로움은 설양에게 있어 한 기억을 불러왔다. 정사를 일으켜 그가 쫓겨나게 만든 부잣집 아씨의 얼굴이 흐릿하게 떠올랐다.
약을 사러 나간다던 설양이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성진은 아픈 몸을 일으켰다. 멈출 줄 모르고 나오는 기침 탓에 목구멍 전체가 쓰라렸다. 바깥에 내리는 눈처럼 차가워지는 손이 계속해서 떨리자 두 손바닥을 마찰시키며 성진은 현관으로 나갔다. 머리 위로 떨어지는 눈은 비록 추운 날씨를 끌고 왔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워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어두운 밤하늘 위엔 환하게 빛나는 별들, 그리고 새하얀 눈송이가 가득했다. 아양도, 돌아오는 길에 이 풍경을 봤으면 좋겠는데. 도착하면 들어가기 전에 보라고 알려줘야겠다. 콜록거리면서도 아름다운 광경에 몰입할 설양을 상상하니 효성진의 입가에는 저절로 미소가 띄워졌다. 조용한 동네에는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눈을 밟으며 이곳으로 가까워지는 소리가 울렸다. 보지 않아도 설양임을 알 수 있었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조금 더 밖으로 나간 효성진은 자신을 보자마자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굳어버리는 설양을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아양, 거기서 뭐 하고 있어. 얼른 들어오지 않고.”
얘가 정말, 입술을 꾹 다물며 그에게로 다가갔다. 오른손에는 약병으로 보이는 무언가가 꽉 쥐여 있었다. 정말로 약을 구해왔구나, 이리 기특할 수가. 그는 다정한 미소와 함께 손을 뻗어 비어 있는 설양의 왼손을 잡아주었다. 미안해, 나 때문에 추운데 고생 많았지. 얼른 들어가서, 효성진의 말은 안타깝게도 끝을 맺을 수 없었다. 설양이 풍기고 있는 냄새가 코끝을 타고 들어와 성진의 머리를 새하얗게 만들었다. 방금까지는 추위로 떨리던 성진의 몸이 이제는 다른 이유로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속에서부터 알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치고 올라와 효성진은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이건 분노였고, 동시에 울화였으며, 한편으로는 배신감이었고, 다른 의미로는 속상한 기분이었다. 잡은 손을 뿌리친 그는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 차가운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뒤따라온 설양이 작은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부르며 옷소매를 붙잡았다. 효성진……. 얕은 숨소리가 말끝에 남아 있었다. 그걸 듣고 있자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성진은 두 눈을 한 번 세게 감았다 뜬 뒤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설양을 노려보았다.
“아양. 너.”
약국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치솟는 노여움을 참느라 성진의 목소리는 그의 어깨만큼이나 떨리고 있었다. 그건 질문이 아닌 확인이었다. 이미 네가 무슨 일을 하고 왔는지 다 안다는 걸 대신 표현한 것이었다. 그러나 설양은 제 입으로 모든 일을 말할 수 없었다. 어찌 털어놓겠는가, 일말의 수치도 없이. 주먹을 꽉 쥔 채 그는 효성진의 시선을 피했다.
“… 아무 일도 없었어.”
말이 끝나기 무섭게 효성진의 손이 설양의 왼쪽 뺨을 때렸다.
해가 떠오르기를 바란 적은 맹세컨대, 단 한 순간도 없다.
어두운 밤길을 자그맣게 비추어주는 별 하나만 있어도 행복할 줄 아는 법을 그에게 배웠으니.
무력하게 돌아간 고개는 원 상태로 돌아오지 않았다. 앓아눕는 날이 늘어가며 살도 빠진 탓에 효성진의 손가락은 잎사귀 하나 남지 않은 나뭇가지처럼 가느다란 모양새였음에도 설양의 왼쪽 뺨은 불그스름한 색을 띄우며 부어올랐다. 그러나 설양은 피부로 느끼는 통증보다 속에서 느껴지는 아픔이 더욱 크고 선명했다. 어떻게, 그런……. 내가 언제, 너한테 그런 일이나 하고 다니라고 가르쳤니? 성진의 숨이 불규칙적으로 거칠게 내뱉어지는 걸 들으며 설양은 그가 단단히 화가 났다고 생각했다. 망해버린 집안 출신이어도 도련님은 도련님이란 건가, 천박한 일엔 응당 미간이 좁혀질 만큼?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걸 참는 건가? 그는 약병을 깨뜨릴 듯이 손에 힘을 주어 주먹을 꽉 쥐었다. 처음부터 설양은 성진이 생각하는 것만큼 착한 아이가 아니었다. 정확히는 그렇게 사는 법을 모르는 거에 가까웠다. 효성진의 곁에서 그에게 감화되어 예전보다 순하게 지냈을 뿐이지 길거리에서 구르던 성질머리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니 장터에 나가 심기를 거스르게 하는 인간이 있다면 성진의 뒤에서 협박을 일삼기도 했고, 언제나 일이 더욱 꼬인다면 폭력으로 해결하겠다는 대책 또한 세우기도 했다. 그런 무뢰배의 기질은 설양에게서 완전히 떠나가지 않은 채 여전히 사고의 한 부분을 지배하고 있었다. 효성진이 생각하는 대로 그가 단순히 착한 어린이에 불과했다면, 성진의 행동에 화가 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가 누구 때문에 그 여자한테 몸을 팔고 왔는데. 이 별 볼 일 없는 약이라도 받아오겠다고, 내가. 그는 딱히 아랫도리 순정을 지키며 살아가는 이는 아니었으나 성진과 함께하게 된 이후로는 누구와도 성관계를 맺지 않았다. 시키지도 않은 절개를 지킨 이유가 효성진 하나라는 건 뻔했다. 그랬는데, 줄곧 잘 지켜오던 순정을 버린 것도 효성진 때문이었는데, 정작 그는 설양이 저지르고 온 일을 받아 들여주지 않는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억울했다. 물론 그에게 들킨다면 크게 화를 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으나 효성진이라면 설양 자신이 한 일을 이해해주고, 그를 보듬어줄 것이라 믿었다. 애초에 이렇게까지 화를 돋워 낼 정도의 잘못인지 설양은 의문스러웠다. 내가 그 과부랑 몸을 섞었다는 게 효성진 당신에게 있어 손을 올릴 만큼 분노할 일이야? 어째서? 이러니까 꼭 바람 핀 남편을 혼내는 아내 같잖아, 저도 모르게 이를 꽉 깨문 설양은 힘이 들어간 손에서부터 시작해 어깨로까지 이어지는 떨림으로 차오르는 화, 그리고 허무함을 표출했다.
설양과 효성진, 누구도 입을 열지 않으니 둘 사이에는 숨소리 섞인 적막이 흘렀다. 현관에 서서 신발도 벗지 못한 설양은 길게 떨리는 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려 성진을 바라보았다. 아랫입술을 깨문 채로 그의 앞에서는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매서운 눈초리를 매달았다. 효성진, 난…! 그러나 설양은 하려던 말의 조금도 뱉어내지 못했다. 손으로 입을 세게 틀어막으며 기침 소리를 죽이는 효성진의 어깨가 심하게 들썩이고 있는 걸 보자마자 머릿속이 새하얗게 번졌다. 억울함도 허망함도 전부 사라진 그 자리에 남은 거라곤 불안감뿐이었다. 그와 잠시 다투느라 효성진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에 스스로를 비난하며 설양은 부들거리는 손으로 약병을 내밀며 그에게 다가갔다.
“얼른 먹어. 내가, 나중에 다 얘기할 테니까, 지금은 일단 약부터 먹어. 제발.”
제대로 벗기지 않은 신발이 아무렇게나 나뒹굴었다. 방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제자리에 선 채 효성진은 설양이 먹여주는 약을 힘겹게 목구멍 너머로 흘려보냈다. 가시로 찌르는 듯한 따가움이 아까보단 나아진 듯해 안도의 한숨을 뱉었다. 약 때문인지 안 그래도 피곤한 몸을 졸음이 뒤덮었다. 다리에 힘이 풀린 건지 살짝 휘청이는 효성진이 꼭 당장이라도 선반 아래로 떨어지려고 하는 유리병과도 같이 위태로워 보여서, 설양은 다급히 제 손으로 성진의 등을 받쳤다. 들어가서 자. 아직 밤이야. 조금씩 눈이 풀리는 걸 억지로 뜨게 하려는 성진에 설양은 그를 부축한 채로 걸음을 서둘렀다. 안방에 들어가 딱딱한 침대 위로 눕힌 뒤, 찬 바람이 새어 들어가지 않도록 두꺼운 이불을 꼼꼼히 덮어주었다. 설양은 오른손을 뻗어 조심스레 효성진의 눈 위를 가렸다.
“아무 생각 하지 말고 자. 약 먹었잖아.”
그 말에 성진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일정하게 흐르는 숨소리를 들으며 설양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이불 밖으로 조금 삐져나온 성진의 오른손을 감싸 쥐었다. 그 위로 얼굴을 파묻었는데 전처럼 다정하게 쓰다듬어주지 않는 게 몹시도 서글퍼졌다. 자다가도 저의 기척이 느껴지면 잠에서 깬 아기를 달래듯 토닥여주고 안심시켜주던 효성진은 온데간데없고, 한 번 잠에 빠지면 평생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깊게 무의식 그 안으로 잠겨 들어가는 효성진만이 남아 있었다. 이대로 영영 눈을 뜨지 않으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은 설양에게 있어 일상에 가까웠다.
설양은 문득 자신들이 지나온 날들이 떠올랐다. 신문을 뿌리고 다니던 중 우연히 발견한 문예지, 그 속에 담겨 있던 효성진의 글, 무작정 찾아간 자신을 상냥하게 맞아주던 효성진,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던 개화기의 풍경을 그대로 담아둔 듯한 다방, 나긋하게 중국어 발음을 알려주던 효성진의 목소리, 어설프게 연필을 잡는 손을 조심스레 감싸며 고쳐주던 효성진의 부드러운 손길, 등불을 켜주며 이제 어둡지 않지? 라며 기대에 찬 눈빛을 하며 웃던 효성진, 처음 완성한 글을 진지하게 읽은 뒤 기특하다며 제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효성진, 언젠가부터 아침이면 금방 일어나지 못하고 한참을 주저앉아 기침을 토해내느라 가빠지는 효성진의 숨소리, 평생을 설양에게 있어 동경의 대상으로만 남을 것 같던 예전의 효성진과 대비되는, 입술을 틀어막던 가녀린 손가락과 뼈가 불거질 정도로 말라버린 손등,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건 잘 알면서도 하루라도 내가 없다면 금방 죽어버릴 것 같은 효성진, 어느덧 엇비슷해진 효성진과의 눈높이, 한 손에 다 잡힐 수 있는 효성진의 얇은 손목, 술에 취해서는 어째서 우리의 운명은 비참한 일만 가져다주는 걸까, 라고 중얼거리는 설양에게 그래도 그 운명이 없었다면 너와 내가 ‘우리’라고 묶여질 일도 없었을 거라며 나지막이 타일러주던 효성진, 그리고 설양이 다른 여자와 교접을 하고 돌아왔다는 사실에 배신감으로 가득한 눈빛을 보이던 효성진.
설양의 날들엔 온통 효성진만이 존재했다.
광저우와 인근 항구들까지 일본군에게 점령당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나라 안에서는 하루라도 빨리 중국과의 외교를 끊으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서방권 세력만큼의 힘이 없는 약한 나라는 시류에 맞춰 곁에 서야 할 곳을 잘 고르는 것만이 격동의 30년대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니, 긴 시간 동안 교류했던 중국이 무너져가자 혼란이 그대로 옮겨붙은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국가의 고위직을 맡은 이들은 대부분이 중국인이라서, 그러한 집단의 활동과 시위 등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진압되기 마련이었다. 생활 형편이 나을수록 중국을 지지하는 입장이 과반수를 넘었고, 이 탓에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사회주의 단체에 가입하는 청년들의 수가 눈에 띄게 증가했다고 한다. 길거리 나갔을 때 빨간 거 하나라도 걸치고 있으면 다 그놈들이지, 자신이 아끼던 붉은색 머리끈을 바지 주머니 안으로 숨기며 설양은 툴툴거렸다. 효성진에게 처음 받은 선물인데, 마음대로 하고 다닐 수도 없는 사회 분위기가 짜증스러울 뿐이었다. 여러모로 혼란스러운 틈을 타 한족들은 전부 이 땅에서 나가야 한다며 주장하는 이들의 개체 수도 늘어나 설양은 한시라도 효성진의 곁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산책을 나갔다가 인근에 사는 주민에게 날계란을 맞으며 이 땅에서 꺼지라는 욕을 들어먹은 이후로는 그에게 붙어 있으려고 하는 경향이 더욱 심해졌다. 아양, 너도 바쁘잖아. 너 할 일 해. 성진은 그리 설양을 타일러도 보았지만, 스승을 닮은 것인지 그의 고집은 굉장히 완고하여 절대 꺾이지 않았다.
설양은 효성진의 권유로 문예지나 출판사 등에 원고를 투고한 이후, 딱 한 군데에서 연락을 받아 제 스승과는 달리 정기적으로 글을 보내주고 있었다. 그 문예지는 바로 전부터 꾸준히 성진의 원고를 실어주던 云梦 이었다. 잡지 자체가 비주류 취향을 주로 다루는 곳이라서, 그리고 효성진의 외조카인 위무선이 편집자로 일하고 있어서 운 좋게 얻은 기회였다. 설양은 얼핏 보면 그와 어울리지 않게 사랑을 써 내려갔다. 화자에 대한 정보는 무엇 하나 알려주지 않고, 대신 화자의 사랑을 다양한 것에 빗대어 솔직한 욕망을 풀어 내렸다. 그 사랑은, 수선화와 같은 꽃이 되기도 했고, 잡히지 않는 구름이 되기도 했고, 땅에 깊이 뿌리 내린 나무가 되기도 했고, 어두운 밤에 불어오는 바람이 되기도 했다. 그의 문체는 꼭 비가 잔뜩 온 뒤의 공터 바닥처럼 질척이는 흙과 비슷해서 몇몇 편집자들은 이런 외설적인 걸 공개적으로 발표할 수는 없다며 벌게진 얼굴로 말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설양의 글은 독자들이 원하는 것과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으니 대부분의 문예지와 출판사에서는 거절하는 게 당연했다. 전쟁이 길어지고 일본이 중국의 주요 도시들을 차례로 점령하고 있다는 소식들만이 연속적으로 발표되는 요즘엔 평화를 기원하거나 중국의 승리, 전 세계적으로 뻗어 있던 권력을 되찾을 수 있다는 희망 등을 노래하는 작품들이 선호도가 높았다. 그런 풍류를 설양은 자주 비웃곤 했다. 중국이 이기면 뭐? 언제는 한족새끼들 다 나가라고 아깝게시리 계란이나 던지면서 소리치던 놈들이, 이기면 콩고물이라도 떨어질까 봐 입 벌리기 바쁘네. 설양이 늘 누군가를 비난하는 소리를 할 때면 그 대상이 누구든지 간에 효성진은 항상 그를 말리곤 했다. 남을 욕하는 말은 함부로 하면 못써, 같은 고리타분하고 태평한 조언과 함께. 그러나 설양이 보는 세상과 성진의 눈에 보이는 세상도 큰 차이가 없는 것인지 그는 전처럼 적극적으로 설양을 말리지 않았다. 그저 한숨과 침묵과 기침과 식은땀이 늘어갈 뿐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쥐도 새도 모르게 효성진이 싸늘하게 죽어 있을까 봐 설양은 매일 가슴을 졸였다. 그의 근심 어린 마음을 하늘도 이해한 것인지, 성진은 그래도 설양이 걱정하는 것에 비해 꽤 오래 살았다. 여러 해가 지나고, 먼 나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했다는 기사가 신문에 실리고, 일본이 미국의 진주만 기지를 습격했다는 이야기가 퍼질 동안 효성진은 바람에 흔들리는 꽃잎처럼 살아 있었다. 베개에 눌려 살짝 엉망이 된 긴 머리카락을 설양이 빗을 가져와 위에서부터 끝까지, 정성스레 빗겨 줄 때면 하얗게 새어 버린 가닥이 한두 개 정도는 나올 때까지 숨을 쉬었다.
“효성진, 이러다 할아버지 되는 거 순식간이겠어.”
“그럴지도 모르겠구나. 시간이 흘러가는 게 너무 빠른 것 같아.”
“큰일 났네. 할아범 데리고 어떻게 살지? 벽에 똥칠하면 산에다 버려버릴 거야.”
짓궂은 말에 성진은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속내엔 효성진이 바르게 피고 앉은 허리마저 굽어질 정도로 나이를 먹을 만큼 세월이 흘러도, 설양 본인은 지금처럼 곁에 있을 거라는 수줍은 고백이 숨어 있다는 걸 알았기에 내보일 수 있는 웃음이었다. 호외요, 호외! 문밖에서 들리는 우렁찬 소년의 목소리에 성진의 머리를 단정히 묶어주던 설양이 시선을 돌려 창문을 통해 바깥을 쳐다보았다. 벌써 나왔나? 잠깐만 기다려, 얼른 사 올게.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를 별안간 고상하게 뻗어진 마르고 쭉 뻗은 손이 붙잡았다. 놀란 눈으로 효성진을 내려다보자 그는 입가에 여전히 얕은 미소를 걸어둔 채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그냥 있어. 어정쩡하게 앉지도 일어서지도 못한 설양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세상 굴러가는 거 토씨 하나라도 안 놓치려고 하던 사람이 웬일이야? 몰라서 나중에 후회하지나 마. 진짜 괜찮아. …… 하기야, 뭐, 대단한 일이 벌어지기나 했겠어? 독일놈들 헛짓거리하는 거나 한 장 가득 채워서 나왔겠지. 일부러 더욱 능청스러운 척 연기하자 성진은 설양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 작게 기침이 터져 나오자 언제 그랬냐는 듯 설양이 당황하며 작은 탁자 위에 놓인 물컵을 집어 성진의 입 앞에 갖다 대었다. 몇 모금 넘기고 나니 가라앉아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틀 전에는 약을 먹여도 멈추지를 않아서 그때의 설양은 말 그대로 펑펑 울고 싶은 기분을 느꼈어야 했다.
길게 숨을 내쉬며 느긋하게 눈꺼풀을 내리감는 효성진을 아무 말 없이 지켜보던 설양은 예고도 없이 그의 품에 안겨들었다. 약간 거친 행동에 놀라 몸이 굳어버린 것도 잠시, 성진은 느리게 손을 들어 제 품 속 아이의 등을 다정히 토닥여주었다.
- 나는 정말이지, 오래 살고 싶었다. 내 힘이 닿는 한 좋은 스승으로서 남아 이 안쓰럽기 그지없는 아이에게 기댈 곳을 내어주고 싶었다. 그런데 요즘 들어 펜을 쥐는 손에 자꾸만 힘이 빠지기 시작한다. 한평생 무언가를 욕심낸 적 없으나 이번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처음으로 하늘에 기도라는 걸 올렸다. 나는 종교를 믿는 사람이 아니지만, 그렇게라도 내 바람을 누군가에게 전달하면 진정으로 이뤄주지 않을까, 라는 야트막한 희망이라도 품어야 할 것 같았다.